산업 경계 사라지는 ‘금융 빅블러(Big Blur) 시대’ 열렸다
● 스타벅스, ‘사이렌오더’로 막대한 충전금 확보
● 막 오른 ‘마이데이터’ 시대, 빅블러 현상 가속화
● 택시 호출 서비스 넘어 금융사로 변신한 ‘그랩’
● DB손해보험, 개방형 API 플랫폼으로 판매 채널 다각화
2020년 10월 미국 시애틀 남부에 있는 한 스타벅스 커피 매장 창문에 “미리 주문하고 스타벅스 앱으로 결제하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스타벅스는 앱 선결제 시스템 ‘사이렌오더’를 통해 매년 막대한 충전금을 확보하고 있다. [AP=뉴시스]
금융 디지털화와 정부의 규제 완화 흐름 속에 ‘빅블러(Big Blur)’ 시대가 도래했다. 빅블러 (Big Blur)는 '생산자-소비자, 소기업-대기업, 온오프라인, 제품 서비스간 경계융화를 중심으로 산업/업종간 경계가 급속하게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2013년 ‘당신이 알던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조용호 저)’에서 최초로 제시되었다. 최근 이른바 ‘빅테크 기업’(대형 정보통신 기업)을 비롯한 여러 회사가 금융업에 진출하는 것은 대표적 빅블러 사례라 할 수 있다.
현금 보유액이 미국 중소 은행과 맞먹는 스타벅스를 보자. 스타벅스의 ‘사이렌오더’는 자체 애플리케이션(앱)에 돈을 충전해 놓고 필요할 때 원하는 음료를 구매하는 시스템이다. 미국 디지털 시장조사업체 이마케터 자료에 따르면, 사이렌오더 이용자 수는 2018년 기준 미국에서만 2340만 명을 돌파했다. 같은 시점에 스타벅스의 전 세계 고객이 스타벅스 앱에 충전한 금액은 20억 달러(약 2조4000억 원)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스타벅스는 이렇게 막대한 규모의 선불 충전금을 은행에 예치해 이자를 받거나 투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아마존, 애플, 알리바바, 알파벳, 텐센트 등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7개가 이미 금융 관련 비즈니스를 영위한다.
국내 기업 네이버, 카카오 등도 금융업에 진출해 기존 금융회사와 경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마이데이터 시대’가 열리면서 빅블러 현상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마이데이터 개념이 정립되면 소비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데이터에 대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금융권에서는 개인의 동의하에 관련 데이터를 제공받아 맞춤형 자산관리를 하는 등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기존 데이터의 관리 주체가 개별 금융사에서 개인으로 변경되는 것이다.
국내 여러 기업이 앞다퉈 이 분야에 뛰어들면서 기업의 디지털 전환 속도가 빨라지고, 금융과 정보기술(IT) 등 업종 간 결합 또한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의 우버’ 넘어선 그랩의 변신
말레이시아에서 택시 호출 애플리케이션으로 시작한 그랩은 금융 분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며 동남아 전역에서 사랑받는 ‘슈퍼 앱’이 됐다. [AP=뉴시스]
요즘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랩’ 앱을 통해 자동차보험에 가입하고, 음식을 주문하는 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그랩은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택시 호출 앱으로 시작했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은 동남아 전체에서 사랑받는 ‘슈퍼 앱’이 됐다.
그랩은 처음엔 차량 공유, 음식 배달 등으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이후 보험·대출·자산관리 등 금융 관련 서비스까지 제공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8년 그랩 내 금융 사업을 총괄하는 그랩파이낸셜그룹이 출범한 뒤 변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랩을 통한 보험 가입 사례는 2019년 4월부터 지난해 11월 사이에만 5000만 건이 넘는다. 그랩파이낸셜그룹에는 간편결제(그랩페이), 리워드(그랩리워드), 대출(그랩파이낸스), 보험(그랩인슈어) 등의 서비스 제공업체가 모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한은행이 연내 자사 앱에 ‘배달의민족’ 같은 음식 주문 중개 플랫폼을 탑재할 예정이다. 신한은행이 지난해 공개한 ‘음식 주문 중개를 통한 소상공인 상생 플랫폼(배달 앱)’ 아이디어는 금융위원회로부터 혁신금융서비스로 인정받은 바 있다. 이를 현실화하는 셈이다.
출처 : 금융위원회 제공
신한은행이 배달 앱을 운영하려는 이유는 수수료 수입을 통한 단기 수익성 확보가 아니다. 그보다는 금융사로서의 공적 기능을 강화하며 ‘양질의 비금융 데이터’를 확보하려는 게 목적이다. 예를 들어 가맹점 매출 데이터, 가맹점주와 고객 간 소통 이력, 입점 기간 등의 정보를 활용하면 신한은행은 대출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 신한은행은 고정 수입 증빙이 어려워 개인 신용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 소상공인과 라이더를 위해 매출 및 수익 통계를 기반으로 한 대출 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가맹점주 관점에서 보면 필요한 자금을 저비용으로 조달하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신한은행은 또 소상공인과 라이더 등을 대상으로 하는 ‘선정산 금융상품’도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기존 배달 앱의 경우 비용을 정산하려면 일정 기간 자금이 묶였다. 이 불편을 해소하겠다는 계획이다. 일반 소비자 대상으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 취향에 맞는 가맹점이나 메뉴를 큐레이션해 주는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빅테크 기업은 금융업 분야 후발 주자다. 하지만 디지털 플랫폼, 대규모 고객, 데이터 활용 역량, 정보통신기술(ICT) 등을 바탕으로 종합적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금융권에서는 긴장을 늦추기 힘든 상황이다. ‘혁신 기술’로 승부를 내는 기존 핀테크 업체와 달리 빅테크 기업은 막대한 고객 데이터와 자본력까지 보유하고 있어 금융권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막강 데이터와 인프라로 무장한 ‘빅테크’의 습격
예를 들어 아마존은 ‘아마존 페이’라는 기존 인프라를 바탕으로 기업 상대 대출 플랫폼을 운영한다. 개인 고객에게는 소비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애플 또한 ‘페이’로 대표되는 ‘지급결제’ 서비스를 기반으로 금융 사업을 확대해 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카카오가 은행(카카오뱅크), 지급 결제 및 마이데이터(카카오페이), 증권(카카오페이증권), 보험(카카오페이보험) 시장에 뛰어들었거나 진출을 앞두고 있다. 네이버는 지급결제 및 마이데이터(네이버파이낸셜) 시장에만 직접 진출했지만, 간접적으로 다른 금융회사와 손잡는 전략을 편다.
빅테크 기업의 금융 영토 확장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보험업계는 협업 강화로 맞서고 있다. DB손해보험은 자사 장기보험 계약 체결 시스템에 ‘오픈 API(Application Program Interface·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적용해 금융 플랫폼과의 제휴 확장 기반을 마련했다. 이를 활용해 보험업계 최초로 카카오 전용 장기보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카카오페이 회원이 DB손해보험 API를 통해 보험에 가입할 경우 번거롭게 여러 정보를 입력하지 않아도 기존 내용이 자동으로 적용된다. 가입 절차가 간소해진 것이다. 이 시스템은 신생 핀테크 업체의 보험 시장 진입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장기적으로는 핀테크 업체 간 경쟁을 촉진하고 혁신 성장을 지원하는 구실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보험사가 이런 행보에 나선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비대면 보험 가입 수요가 늘어난 영향으로 보인다. 또 장기 영업이 중요한 보험사로서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와 접점을 늘리는 것이 생존을 위한 주요 과제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앞으로 이런 시도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 글 / 이노핏파트너스 윤정원 대표
| 정리 / 이노핏파트너스 마케팅팀